원자재 금융화의 나비 효과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필요한 거대 자본은 주식이나 부동산 같이 외부 경제 충격에 영향을 받는 자산이 아닌, 가격 면에서 주식 시장과 관계가 없는 비상관 자산이 필요했다. 그래서 발견한 게 원자재를 거래할 수 있는 파생상품 시장이다.
그런데 원자재 파생상품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19세기에서 20세기말 두드려졌던 곡물 시장 조작 문제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19세기 중반 농부들이 갓 수확한 밀을 가지고 시카고로 몰려들었다. 공급이 폭발하자 가격이 폭락했고 농부들은 급기야 헐값이 된 곡물을 미시간호에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와중에 농부들이 곡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1년 중 특정 날짜에 인도할 수 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는 '선물 계약'이 탄생했다. 하지만 실제 구매자가 1년 내내 많지는 않으므로 곡물 시장에는 언제라도 선물 계약을 매입할 수 있는 민간 투자자가 들어와야 했다. 이들은 투자자(Investor)의 가면을 쓴 투기자(Speculator)일 때가 많았다. 투기자들은 미래에 생산될 밀에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고, 농부들은 이 보증을 이용해 은행 융자를 받아 수확에 필요한 보증을 마련했다. 그리고 투기자들은 위험을 떠안는 대가로 '위험 프리미엄'이라는 약간의 할인을 받았다. 여기서 농부와 투기자가 맺는 선물 계약의 가치는 실제 밀에서 '파생'되었기에, 이러한 계약은 최초의 '파생 상품'으로 불렸다. 이 마법 경제는 곧 실물 경제 규모를 훌쩍 넘어섰다. 원래 실제 상품(실제 밀)을 투기하려면 해당 상품을 보관할 창고나 운송 수단이 필요했으나 이 마법의 선물 거래는 계약만 맺으면 된다. 투기자들은 밀, 귀리, 돼지고기 등의 공급을 독점해 실물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선물 가격을 조작하려 했다. Wag the dog.
물밀 둣 밀려오는 금융 자본은 원자재가 현실 세계에서 가지는 '본질적' 가치와 관계없이 가격을 밀어 올렸다. 20년 간 큰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원자재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즉 원자재가 '금융화'가 되면서 원자재 가격은 물리적 현실에서 떨어져 나가서 타 금융 자산과 상관성을 갖게 되었다. 2007년 주택 시장이 붕괴하자 부동산에서 빠져나온 자본은 부동산과 명백히 관련이 없는 다른 금융 자산 피난처를 찾았고 원자재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자본이 주택에서 원자재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거품도 함께 이주했다. 2007년 식량 생산량이 계속 늘어나는데도 식량 가격이 치솟기 시작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원자재 금융화의 나비효과일까? 식량 값이 급등한 탓에 1억 명을 기근에 빠뜨리고 폭동과 혁명을 촉발한 세계 식량 위기는 그보다 더욱 심각했다. 금융은 이야기를 먹고 거대해진다. '이라크에서 IS가 득세하면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길 테니, 석유 선물가격이 급등하지 않을까?'라는 내러티브를 시장이 동의하면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만 벌어질 거라 예상되는 석유 공급 차질이 시장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IS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자금줄이 되어줄 석유 공급을 차단하는 행동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석유 공급에 차질 따위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산유국들은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시장이 받아들인 내러티브로 인해 석유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석유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원자재도 마찬가지다. 원자재가 금융과 만나면 집단 살상무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