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계층의 통신 요금에 대하여
나에게는 엄마 쪽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 원래 백수라서 시간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엄마와 함께 조부모 집으로 향했다. 그들의 휴대폰 통신사를 바꾸기 위해서다.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거의 사용할 줄 모른다. 사용하는 기능이라고는 전화와 메시지밖에 없으니 나의 조부는 나를 만날 때마다 휴대폰 요금을 싼 거로 바꾸어 달라는 요청 했다. 나는 매번 다음에 해드린다고 했다. 평일에 시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실 시간은 만들면 그만이었다. 본질적인 이유는 귀찮음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모는 필요 이상으로 휴대폰 요금을 많이 내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요금은 한 달에 각각 3만 원 이상씩 납부하고 있었다. 아니! 모바일 기기 적극 사용층인 나도 한 달에 17,000원가량 납부하는데, 나보다 휴대폰 사용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이 나보다 많은 요금을 낸다니! 충격적인 동시에 안타까웠다. 아니, 더 나아가 '대부분의 노인들이 이렇게 요금을 많이 내나?'라고 확대해석마저 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요금제는 SKT. 즉, 흔히 말하는 대기업 서비스였다. SKT, KT, LGU+. 이 대기업 통신 3사에서 제공하는 요금제는 비싸다. 통신 3사에서 제공하는 요금제가 비싼 이유를 추측하면, 통신 서비스와 부가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영화 티켓 할인, 주유 할인, 커피 할인)가 많아서 그런 거 같다. 이 비싸다는 의미 역시 예전에는 통용되기 힘들었다. 비교군이 이 통신3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끼리 담합이라도 한 양 셋 다 비슷비슷하니 말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알뜰통신사'라는 사업자가 통신 업계에 작은 공을 쏘았다. 그들은 타겟층은 정확히 나와 나의 조부모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통신 3사가 제공하는 부가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제외하고 통신 서비스만 제공했다. 부가서비스가 제외되니 요금제는 혁명적으로 낮아졌다. 데이터나 통화 품질 역시 통신 3사의 망을 대여해 쓰는 거니, 이 역시 걱정할 필요 없다.
이처럼 알뜰통신사는 통신 요금이 부담되는 서민층을 위한 훌륭한 대안이 됐다. 하지만, 나의 조부모는 이 같은 혜택에서 제외됐다. 아니, 그들은 대안이 있는지도 몰랐다. 모든 시니어층들이 나의 조부모와 같은 인식 상태를 가졌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가 비슷한 인식 상태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솔직히 조금 화가 났다. 더 저렴한 대안이 있는데도 과소비를 하는 현 상황이 말이다. 통신사들은 그들에게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 말이다.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소비자가 한 달에 비싼 요금제를 사용해 주니 통신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을까? 기업 입장에서는 무지한 소비자가 가장 고맙기 마련이다. 자신의 이익을 깎아내는 사람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찾기 힘들다. 우리는 모두 다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니까. 메시지피싱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자가 양산됨에도 통신사들이 대안 마련에 왜 미온적인지 아는가? 그들의 이익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많이 보낼수록 통신사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설령 그것이 범죄와 관련된 메시지라도 말이다.
나는 알뜰통신사라는 대안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요금제를 변경해주기 위해, 오늘 하루 그들에게 내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했다. 온라인 개통이다 보니, 편리한 면도 분명히 있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 때문에 더럽게 고생한 하루였다. 과연 자식이나, 손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들의 통신 복지를 걱정해 줄 것인가. 기존 통신 3사는 제공할 유인이 없다. 알뜰통신사는 제공할 유인이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객을 늘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자식과 손자가 챙길 수 없는 시니어 계층도 많으니 그들이 조금 더 시니어 계층의 통신 복지에 신경써주면 좋겠다.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니 말이다.
나의 자본주의 적응 포트폴리오에 사례 하나가 더 추가됐다.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줬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을 기쁘게 해 줬다.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투입해서 말이다. 이렇게 작은 성과들을 쌓다 보면 나 역시 자본주의에 적응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