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Log/2023

신과 오만

깡칡힌 2023. 5. 25. 10:45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확률적으로 말이다. 아침에 스터디카페로 향하던 중 아주대 학생 중 한 명이 나를 멈춰 세웠다. "혹시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3분 정도만 발표하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보나마나 개소리를 할 것 같을 게 뻔하니 매몰차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전에도 부활절의 거짓된 진실에 대해서 이들 무리에게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활절이야 거짓이든 아니든 나와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에게 내 소중한(남들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시간을 내어준 것은 그들의 용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격 자체가 소심하고 겁이 많아 모르는 이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부럽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사실 내가 원하는 바(여기서는 나의 시간)를 얻기 위해서는 거절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10번 안 돼도 1번만 성공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시간을 내준 것은(내주었다고 표현하니 건방져 보이는 것 같기도) 그들의 용기가 부러워서다. (사실 그들이 하는 주장 자체는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런데... 저번 한 번만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얘기를 들었건만 오늘 또 잡히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이들은 어떤 사람에게 접근해야 말을 들어주는지 아는 듯하다. 내가 호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젠장(?!) 여하튼 오늘 주제는 신, 즉 하나님의 존재였다. 신을 믿지 않는 나는 당연히 동의해 줄 만한 얘기가 하나도 없었고 그들이 증거라고 내세운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 모두 그냥 끼어 맞춘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다윈교 신도가 된 나로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생겼다. 내가 책에서 배운 논리와 논거를 그들에게 제시하면 뭐라고 반론할까? 그리고 몇 차례 토론을 이어갔다. 꽤 재밌는 시간이었다.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헤어진 뒤, 내 태도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꽤나 건방졌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 논거로서 최근 책에서 배운 진화론에서 파생된 논리를 그들에게 제시했다. 어떻게 반박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아마도 학계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들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하면서 계속 웃음을 진 상대방의 모습에 내가 이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원하는 바, 즉 시간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고 나의 기분이 상하면 안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내 기분을 신경 썼던 것이다. 내가 이긴 듯한 느낌이 들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똑똑한 학생이었다. 나보다 훨씬 더 말이다. 나는 그들 나이 때 자의식 과잉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그들은 어떻게 타인에게 접근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잘 학습된 상태였다. 이런 젠장.. 또 당한 건가! 그들이 내게 보여준 친절... 그리고 상대방이 이기게 하는 전략. 그리고 자의식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기 객관화. 이들은 누구보다 자본주의 체제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난 순간적인 기분에 취한 자의식 과잉의 백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직까지 말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