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 ‘우리 것’ ‘우리 것’ 하면 할수록 우리 모습은 작아진다. 그것 아무리 보아도 자신감이 없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끼리 하지 말고 남들과 경쟁해보고 ‘너희 것 좋아’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 기피증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싫어하거나 불안하게 느끼면 미리 도피해버리는 증세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핑계를 만들게 된다. 핑계 대지 말자.
- 어느 나라나 법은 다 있다. 조선시대에도 위대한 법전 경국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법은 엿이었다. 늘이면 늘어났고 자르면 잘라졌다.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법은 있었지만 ‘rule’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법을 똑같이 적용받는 규칙, 그 규칙이 조선에는 없었고 한국사회에도 없는 것이다.
- 동양 사회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 중에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채 발전을 더디게 하는 문제
- 법치가 되지 않는다
- 늘 과거에 묻혀 산다
- 주검을 숭배한다.
- 나는 IMF를 ‘자본종속’ 운운으로 해석하는 민족적 울분에서 그 뒤에 숨어있는 허탈과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의 콤플렉스를 읽는다. 분노는 수치심과 연결된 감정이라던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미리 펄펄 뛰는 것이 분노라면, 우리의 민족주의적 구호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들의 부끄러움도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 정치인들, 당연히 그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왜곡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아무런 혀 물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요괴들이다.
- 기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청국장처럼 냄새가 풀풀 나는 현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없이 채팅하듯 기사를 뱉어내는 고급 룸펜들이다.
-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빙충이들이다. 그들이 논문에 써대고 강의실에서 뱉어내는 말들은 아무곳에서도 써먹을 수 없는 그들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끼리끼리 만나서 자리를 나누고, 적당히 등록금과 세금을 연구비나 학술보조비 따위로 나누어먹으며 시시더걱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하는 저열한 인간들이다.
- 21세기 미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유목민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정보와 돈과 문화적 가치는 이제 한가하게 국경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물어 지구 어디로든지 치닫고 있다. 유목민들이 풀을 찾아 양떼를 몰았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런 지금, 한가하게 그들에게 박수를 칠 시간이 어디있는가? 정치적 우울과 경제적 실연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3S(Sport, Sex, Screen)의 구호품을 받아 정신적 삶의 한 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 10대는 문화적 고아들이다. 한국이라는 문화적 공간 속에 살고 있으나, 그들은 ‘한국 싫어’를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자식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우리들의 20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들이다. 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의 피난처인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세월을 죽인 결과는 졸업장과 동시에 수여된 실업 면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나이 제한에 걸려 입사 원서조차 쓰지 못하게 생겼다.
- 30대는 1회용 반창고다. 어설픈 지식을 다 써먹는 5년 후쯤이면 미국, 유럽, 일본에서 밀려들어오는 실력자들에게 밀려날 신세들이다. 이미 이들은 물 좋은 카페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봐야 후회의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인데 말이다.
- 지금의 40대는 이미 용도 폐기를 얻도받았다. 튈 만한 힘도 없고 감각도 없다. 그렇다고 권위도 없다. 이들의 곁에는 정력이 최고조에 달한 마누라와 한창 등록금과 용돈을 퍼주어야 할 아이들이 펄펄 뛰고 있다.
- 그 옆에는 엉거주춤한 50대가 있다. 어차피 이제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아버린 이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눈치나 보면서 연명하는 것이 최고다. 이해 비해 나름의 퇴직금이라도 건진 60대는 노여워해 볼 수도 있다. ‘괘씸한 것들’하면서. 하지만 차라리 행복한 분노다.
- 우리 문화에 대한 적극적 해체는 자기 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제대로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며, 스스로 얽은 그 의미의 그물에 구속되는 동물이다.
- 역사를 보면 정치에 머리 숙인 철학은 언제나 그 시대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고는했다.
- 한일합방, 6.25, IMF는 국가적 사건이지만 그 출발은 결정권을 쥔 ‘힘’을 가진 자들의 적절치 못한 의사결정에서 비롯됐다. 특히 한일합방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금과옥조로 생각해온 유교 문화의 온갖 병폐가 붕괴 사이클을 따라 퇴적되어오다가 붕괴의 시점에서 마침내 터져버린 최악의 재앙이었다. 나라의 미래나 민족 구성원들의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과 자신이 속한 파벌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데 급급했던 지도층의 틈바구니로 일본은 밀고 들어왔다. 각각에게 권력과 돈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대신들 중 끝까지 반대를 한 사람은 참정대신 한설규와 탁지부대신 민영기에 불과했다.
- 사실 되돌아보면 한일합방은 여간 황당한 사건이 아니다. 만일에 당시 사대부들이 논어와 맹자를 잠시 놓고 격동하는 국제 정세를 텍스트로 삼았더라면, 그들이 민족 전체를 고려하고 사태를 조금만 더 냉장하게 살펴보았더라면,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의 문물을 보았던 민영환이란 인물이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대신 자리에서 밀려난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런 인물이 몇 더 있었더라면 한일합방 같은 황당한 사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총도 한 방 안 쏘고 나라를 내주는 인간들인 인간들인가?
- ‘정성껏’이라는 말이 대단히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성의를 봐서 봐주고’ ‘정성을 봐서 봐준’ 결과들이 만든 건 엉성한 조직력이다. 냉정한 프로들의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이 바로 이 ‘성의’ 문화다. 이가 망가지고 혀의 점막이 퇴화해 미각이 둔해지며 내장 역시 기능이 떨어지고, 특히 소화기능도 낮아진 노인들을 펄펄 뛰는 손자들과 한 밥상에서 ‘진지’를 드시게 하는 성의는 진지한 해결책이 아니다. 서로의 기호와 신체 기능에 따라 식단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 적지 않은 노인들이 버려지고 있고, 방안에 수감되는가 하면, 때론 원치 않는 손자들까지 봐야 하는 사회봉사(?) 명령까지 받고 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그들은 손자들 뒷바라지를 즐기지 않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노인들이 내 아이를, 즉 손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노시면서’ 아이들을 봐주시기를 희망한다. 지극히 희망사항이다. 때로는 이것을 효도의 한 덕목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손자를 안겨드렸다는 착각 말이다.
- 하지만 노인들도 노인들의 인생이 있다. 그들도 부부끼리 뽀뽀하고 싶고, 여행하고 싶고, 맛있는 것 먹 고싶고 좋은 옷 입고 싶다. 그러나 효도가 이들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대를 모든 일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가볍고 건강하게 마무리할 삶의 권리가 있다.
- 유교의 여인상: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는 법도를 평생의 의무로 생각하는 유교에서 제시하는 여성상
- 나는 한국의 영어 교육이 실패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반드시 써먹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데 있다고 본다. 선생과 학생 모두 써먹겠다는 의지와 필요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고 익히는 게 아닌, ‘관문 통과’를 위해 필요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늘 골치만 아프다. 또 교과서를 만들 때도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겠다는 유교적 ‘훈수’의 가치관이 바닥에 깔려 있다.
- 주변에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국민들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동안 나름의 대비책을 마련하면서 항상 살아남았다. 6.25 때 정부와 이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내빼면서도 ‘서울을 사수하자’고 외쳐댔다. 정부가 우리를 속여먹던 일이 어디 그뿐이랴?. 때문에 그러한 학습 효과가 살아 있는 한, 닥쳐올 험난한 21세기에도 실험실의 흰쥐 꼴이 되고 싶지는 않다.
- 한국의 학생들이 기를 못 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점수와 등수 때문이다. 이 점수와 등수는 알게 모르게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데, 대학 평가제를 바라보는 대학들 역시 주눅들기는 매한가지다. 공연히 찍히기 싫어서 모두들 설설 긴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가라 문화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기회가 되었다.
- 윈시 사회에서 폭력은 생산도구를 독점하고, 도구의 독점은 생산을 다시 독점해 권력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 권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마든 이른바 제도에 의해 세습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세습은 마침내 계급을 만들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일류 대학들이 만들어내는 커넥션 역시 이런 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 즉, 위장된 폭력을 통해 지식을 독점하고, 지식 독점을 통해 발언권을 확보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멤버를 끊임없이 보완하여 세습해가는 과정이 동일한 것이다. 세칭 일류대 교수들이 약간의 학문적 기초를 쌓은 다음에 부지런한 인사를 통해 ‘원만한 인격’을 만든 후 정치판으로 뛰어드는 모습 역시 그 궤를 같이한다.
- 학교 안은 스스로 선생이기를 포기한 월급쟁이들이 우글대고 있다.
-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해체해보는 발상의 전환이 있지 않으며 어떤 제도도 우리들을 지루한 ‘공부’에서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공부’는 이제 세계의 모든 문화를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개혁되어야 한다. 책상에서 ‘쓰기’만을 할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과제를 찾고, 그것에 숨어 있는 ‘왜(why)’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자신만의 창의적인 해결책을 위해 정보를 ‘어디에서(where)’ 찾아내고 ‘어떻게(how)’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르다. 각기 서로 다른 가능성과 마음과 두뇌를 선물로 받고 태어난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말 잘 듣게’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특히 엄마들이 무심코 내뱉는 “네가 뭘 알아” “그게 아니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라는 외마디들이 아이들의 창의력과 지적 의지 성장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지, 부모들은 너무도 모르고 있다.
- 창의력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획일화다. 그리고 강제적 질서 유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질서 유지 콤플렉스는 유교 문화의 ‘도덕적 잣대’ 때문에 만들어졌다. 더 나이 드신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초등학생을 둔 30대, 40대 부모님들도 유교적 교육 문화에 머리가 절어있는 사람들이다.
- 꿈이 없는 공부는 좌절 아니면 야비함만을 기르고 만다. 히로나카는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승들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우리가 공부가 지겨운 이유는 선명하다. 즐거움의 핵심인 대화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가르침은 배움의 본질이 아니다. 생각이 다 자라기도 전에 학문적 정답만을 머릿속에 욱여 넣는 교실, 창조성을 도살하는 도살장이다.
- “창조라는 것의 출발은 언제나 유치하기 마련이다”
- 우리 사회의 아픈 모습을 지적하면 끝이 없지만 원인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모두가 공감할 시대정신이 이 사회에는 없다.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모두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이 사회에는 없다. 잠시 기다리면 모두에게 기회가 온다는 신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내일을 위해 인내할 만한 가치가 없다. 목소리 큰놈이 정의고 먼저 입에 틀어넣는 놈이 임자다. 국민들은 더 이상 순진을 떨 수가 없다.
- 새롭고 큰 시대정신을 폭포수같이 쏟아 주실 스승이 아쉽다. 역사의 촌지를 받지 않은 큰 스승이 너무도 절실하다. 큰 스승이 계셔 물이 시퍼렇게 오른 물푸레나무로 국민을 괴롭히는 저 왕초들과 졸개들의 등짜구니가 후줄근하도록 패주시면 우리들도 기꺼이 종아리를 걷을 터인데
- 인선을 맡은 요직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조선시대 사색당쟁의 악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자신의 능력을 더 개발하고, 더 의미 있는 일에 뛰어들려는 노력보다는 줄 잘 서서 출세하겠다는 성공 콤플렉스, 영토를 ,문화를, 과학을, 사업을 확장하려는 의지 없이 제 살 깎기의 악순환이 만들어낸 것이 조선의 몰락 아니던가?
- 내가 누구를 돕고 있다거나 누구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성취감만큼 상대를 우울하게 만드는 감정도 없다. 그것은 때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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