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가격. 제목이 다소 자극적이다. 원제는 Price Wars이다. 번역하면 가격 전쟁 정도가 되겠다. 그냥 한국판 제목도 빈곤의 가격이 아닌 가격 전쟁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무미건조한 제목으로는 나 같은 사람이 안 산다는 출판사의 전략적 목적이 있었을까? 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네이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구매했다. 어떻게? 제목에 이끌려서! 그런 면에서 빈곤의 가격이란 제목 마케팅은 성공했다!)
나비효과라는 말 들어봤는가? 흔히 대륙 건너편에서 있는 한 나비의 날갯짓이 허리케인이 돼 미국을 강타한다는 표현으로 쓰이고는 하는데, 이 책은 원자재 가격이라는 나비의 날갯짓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인과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지금부터 그 영향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그전에 원자재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가자. 원자재란 말 그대로 원료가 되는 자재, 즉 어떤 물건을 만들 때 필요한 원료라는 뜻이다. 빵의 경우엔 밀일 것이고 우리가 만날 사용하는 공산품일 경우에는 석유가 원자재다 된다. 즉, 석유, 밀, 쌀, 옥수수 이런 것들은 모두 원자재다. 만약 당신이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부라고 해보자. 현재 당신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무엇인가? 내가 농부라면 생산량이 가장 걱정될 거 같다. 원자재는 그 특성상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옥수수의 경우에는 외부 영향이 날씨다. 그래서 특정 해에는 날씨가 좋아서 생산량이 많지만 그다음 해에는 가뭄이 들어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질지도 모른다. 즉 외부 영향에 따라 수급이 불안정하다. 옥수수 공급업자만 문제랴? 이번에는 옥수수를 많이 사용하는 소비자 입장 되어보자. 당신은 옥수수 빵을 만드는 제빵업자다. 옥수수 빵에는 옥수수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올해 가뭄이 때문에 옥수수 가격이 지난해보다 3배가량 뛰었다. 아이고야 큰일 났다. 이래서는 빵을 만드는 게 더 손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감이 오는가? 원자재 생산자와 소비자 둘 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안정된 가격에 원자재를 공급하고 그리고 공급받고 싶은 동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선물시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Present나 Gift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먼저 선, 물건 물)은 Futures, 의역하자면 미래의 물건(?) 정도가 되겠다. 즉 선물이란 향후 특정 시기에 현물(여기서는 옥수수가 된다)을 미리 정한 가격으로 거래하는 계약을 의미한다. (정확히는 선물 계약이다) 선물 계약을 활용하면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올해 옥수수가 과생산 돼서 가격이 떨어지면 그만큼 손해니 미리 정한 가격으로 팔면 마진을 남길 수 있으니 이익이다. 소비자 역시 옥수수 가격이 급등하면 옥수수를 구매하는 게 제한되니 적당한 가격에 확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나쁘지 않은 계약이다. 물론 선물 계약을 맺으면 매우 비싸게 팔거나 매우 싸게 사는 경우는 제한되지만 두 이해 당사자 모두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선물 계약은 두 이해당사자의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선물 계약을 실제 이해 당사자만 하면 매우 좋겠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무슨 말이냐고? 선물 계약은 금융 상품이다. 즉 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옥수수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우연히 옥수수 작황이 올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옥수수 작황이 좋지 않으면 옥수수의 공급이 줄어드니 가격이 상승할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옥수수를 1톤당 30,000원에 총 10톤 살 수 있는 선물 계약을 구매한다. 헷갈리지 말자. 내가 구매한 것은 옥수수가 아니라 옥수수를 계약 그 자체이다. 즉, 미래에 나는 공급자에게 무조건 1톤 당 30,000원에 10톤을 구매해야 한다. 무르는 건 없다. 약속이니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대로 옥수수 작황이 좋지 않아 옥수수 가격이 1톤 당 150,000원으로 폭등한다. 나는 1톤을 30,000원에 구매할 수 있으니, 1톤당 120,000원의 차익을 볼 수 있다. 나처럼 선물 계약을 맺은 사람이라면 적정 가격에 옥수수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인 듯하다. 나는 그들에게 옥수수를 팔려고 한다. 이제 부자 될 일만 남았다.
위 예시를 이해했는가? 문제가 뭘까? 선물 계약의 취지는 양 이해당사자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고 비교적 적당한(?) 가격으로 원자재를 공급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해 관계가 없는 나 같은 제삼자가 순전히 투자 목적으로 선물 시장에 진입했다. 투자하는 게 죄냐고? 그럴 리 있겠나. 하지만 그 대상이 원자재라는 게 재앙의 시작이다. 원자재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재화다. 밀이나 쌀 그리고 옥수수 같은 작물이 없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런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도 우리의 삶은 매우 퍽퍽해진다.
잠시만 이야기를 방향을 틀겠다. 자산의 가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강남 아파트는 왜 비싼가? 애플 주식은 왜 비싼가? 최근 이차전지 주식은 왜 이리 급등하는 거지? 자산의 가격은 누가 정하는 건 누구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가? 강남의 아파트와 내가 사는 아파트인데도 불구하고 강남의 아파트가 몇 배는 더 비싸다. 그 이유는 무식하게 말하면 그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이다. '거래된다'는 의미는 그 가격으로 누군가가 팔고 또 누군가가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래 당사자들(판매자와 구매자)은 바보가 아니다. 판매자는 그 가격에 팔릴 거 같으니 그 가격에 매물을 내놓은 거고, 구매자 역시 그 가격을 주고서 살 만큼의 가치가 있으니 해당 가격에 구매를 하는 것이다. 즉 시장 참여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가격이 그 자산의 가격이 된다. 시장 참여자들이 동의하는 가격. 이게 핵심이다. 다시 옥수수 얘기로 넘어오자. 나는 왜 옥수수 가격이 상승한다고 생각했을까? 작황이 안 좋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작황이 안 좋다는 이슈는 옥수수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가? 즉, 시장 참여자가 모두 동의할 만한 이슈일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할 것이다. 수요 공급의 원리에 의거하면 말이다. 만약 작황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외국에서 매우 싼 가격에 옥수수를 수입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작황과는 별개로 옥수수의 공급이 넘쳐나니 옥수수 가격이 폭등하지는 않을 것이다.
증시에서 나 같은 개인은 얼마나 될까? 어떤 블로그에 따르면 미국, 유럽, 한국이나 일본 증시의 60~75%가 알고리듬 트레이딩으로 거래된다고 한다. 즉, 리포트에서 발표하는 예상 수확량, 수확 면적에 대한 인공위성사진 등을 분석한 알고리듬이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베팅하는 게 다반사다. 여기에는 한 가지 알고리듬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개입한다. 규모가 큰 헤지펀드는 모두 자동화된 알고리듬 매매를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 A회사 알고리듬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데이터를 기반으로 옥수수 가격 상승에 베팅을 하면 B회사 알고리듬 역시 분석한 데이터들, 그리고 다른 알고리듬이 판단까지 고려해서 베팅을 한다.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 A 회사 알고리듬: 옥수수 작황 안 좋을 거라고 예상됨. 선물 매수
- B 회사 알고리듬: 옥수수 작황 안 좋을 거라고 예상됨. 그리고 보나 마나 A회사 알고리듬도 이렇게 생각할 거임. 선물 매수 ㄱㄱ
- C 회사 알고리듬: 옥수수 작황 안 좋을 거라고 예상됨. 그리고 다른 회사 알고리듬 100% 똑같이 판단할 거임. 선물 매수 가즈아
이처럼 알고리듬의 판단 프로세스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개입돼 있다. 실제 작황이 좋은지 안 좋은지 확정적 결과는 알 수 없다. 예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리듬들은 데이터 이외에도 다른 알고리듬의 판단까지 고려하여 결과를 예측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옥수수 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즉 사실이 아니더라도 가격이 상승하면 가격 상승의 근거는 사실이라고 '확정'된다. 이것인 선물 거래의 프로세스다. 헤지펀드들이 하는 원자재 선물 거래는 투기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다른 것도 아닌 원자재라는 게 문제다! 결과적으로 이런 알고리듬들이 수행하는 원자재 선물 트레이딩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고통의 종류도 다양하다. 어떤 이는 직업을 읽고 어떤 이는 나라를 잃는다. 이제부터 이런 원자재 선물 거래의 결과, 나비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책에는 많은 나라의 예가 나오지만 나에게 비교적 익숙한 베네수엘라(TV에서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에)의 나비 효과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베네수엘라는 산유국이다. 국가의 주 수입원은 원유 수출이다. 자국에서 생산하는 공산품은 거의 없다. 품질이 떨어질뿐더러 가격 경쟁력 면에서 수입품에 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유를 수출해서 번 달러로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대부분 수입한다. 2011년 즈음에 IS가 시리아나 이라크를 거점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IS가 이라크 공급원을 차지했다는 뉴스가 퍼졌다. 선물 시장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IS가 이라크의 석유 공급원을 차지하면 석유 공급에 제한이 생겨, 유가가 폭등할 것이다' 그때부터 유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유가의 상승이 IS가 석유 공급원을 차단했다는 의혹을 사실로 확정시켰다. 시장이 그렇게 판단했으니 말이다. 베네수엘라는 폭등한 유가 덕분에 엄청난 달러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평상 시의 몇 배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자국에 투자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로 큰 수익을 올리는 동안에는 볼리바르화의 가치가 상승했고, 각종 수입품이 베네수엘라로 흘러들어왔다. 그 사이 베네수엘라의 농업과 제조접은 값싼 수입품과 경쟁하지 못하고 더욱 후퇴했다.
자, 유가가 상승한 근거가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렇다. IS가 석유 공급원을 차단할 것이라는 컨센서스가 선물 시장에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리듬들이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바보가 어디 있으랴? IS는 바보가 아니다. IS는 석유를 시장에 공급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조직을 키웠다. 즉 석유는 시장의 예상과는 다르게 정상적으로 공급된다. 그와 동시에 유가 폭락했다. 아니, 유가의 거품이 꺼졌고 베네수엘라의 수입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수입은 계속적으로 해야 한다. 먹고살아야 하니 말이다. 줄어든 달러 수입으로 원래의 수입 수준을 유지하려니 베네수엘라의 화폐 가치는 폭락했고 초인플레이션이 닥쳤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이다. (아주 디테일한 흐름을 모두 서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과정은 비슷하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가난해졌고, 일자리도 잃었다.
이것이 투기적 원자재 선물 거래의 나비 효과다. 책의 대부분은 이런 나비 효과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쉽지 않다. 그 인과관계의 사실 여부는 논리적으로 보이나, 내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서웠다. 금융이 대량 살상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단순히 돈을 벌고 싶다는 그 욕심. 그 욕심을 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우리의 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우스운 것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선물 시장)에 의해 인간의 삶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AI가 우리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멸종시킬 거라는 주장을 우스갯소리로 늘어놓지만, 이미 선물 시장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멸종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간은 뛰어난 인지 능력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이 행성을 독차지했지만 종국에는 스스로를 멸종시키는 아주 우습고도 아이러니한 존재가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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