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유튜브 마케팅에 당한(?) 책이다. 아니 당했다는 표현보다는 추천받은 책이라 해야 맞겠다. 이 책은 폴리매스에 대한 책이다. 혹시 폴리매스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책에서 이 단어를 처음 접했다. 그래서 책팔이를 위해 만든 단순 마케팅 용어인 줄 알았는데, 폴리매스(Polymath)는 이미 존재하는 영단어다. 폴리매스는 '박식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많은 지식을 가진 이를 우리는 박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폴리매스는 단순히 박식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폴리매스를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며 방대하고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 이라고 정의한다. 즉 단순히 박식한 사람이 폴리매스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 만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누가 있을까... 그래, 정약용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실제로 정약용은 이 책에서도 다뤄진다. 세종대왕 역시 폴리매스임에도 다뤄지지 않은 게 약간 아쉽다) 정약용은 정조 대왕 시기에 도시 공학자로 일했으며, 유베 생활 중에서는 경제, 철학, 의학, 자연과학, 음악 등 얼핏 보면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는 주제에 대해 수 백 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정약용은 단순히 이 분야들에 발만 걸치고 있던 게 아니라, 책을 쓸 만큼 박식한 전형적인 폴리매스였다. 우리는 제너럴리스트와 폴리매스를 구분해야 한다.
이 책은 폴리매스들의 업적의 나열이 많아서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중간 중간에 내가 예전에 고민하고 불만스러웠던 포인트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담겨 있어 그 부분만큼은 매우 집중해서 읽었다. 바로 전문성에 대해서다. 폴리매스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문성에 대한 함정이다.
그전에 잠시 호기심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성인 걸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주변 환경을 탐구하고 새로운 경험을 추가하는 본능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호기심이라는 본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궁금해했다. '왜 새들은 저렇게 날 수 있는 걸까? 우리도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이동수단은 없을까?' 이런 호기심들이 우리의 기술의 발달을 자극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호기심이 만든 세계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단 위와 같이 인류의 문명에 기여한 거대해(?) 보이는 호기심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항상 궁금해한다. 요즘 들어, 나 역시 내가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 석유를 태워야 에너지가 발생하지? 석유는 태오면 이산화탄소 때문에 환경에 안 좋은데, 석유 대신 물을 태우면 안 되나? 왜 하필 석유지?' '왜 똑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데, 한 명은 도전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한 명은 도전에 대한 역치가 높지?' '왜 남자는 여자의 젖가슴을 좋아할까?' 등 살다 보니 궁금한 게 계속 생긴다. 왜 이 얘기를 하냐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호기심이 말살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당신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직업 세계에서 좋은 대우를 받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공적 만남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적 만남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직업으로 규정짓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직업부터 묻고 싶어 안달이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궁극의 질문이며 우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매우 진실된 답을 원한다.
혹시 그런 물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및 정보들은 학문이라는 범주 하에 나누어져 있을까? 나는 고등학교 때 사회탐구로 세계사와 세계지리를 공부했는데, 두 교과목에서 다루는 내용이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았다. 지리는 자연 현상과 더불어 인문 현상도 다루는 과목이다. 인문 현상에 사람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경험한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애초에 학문은 왜 나누어져 있는 걸까? 국어와 수학은 결합할 수 없는가? 물리학은 사회학을 만나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정답을 알려주겠다.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아날로그처럼 연속되지 않고 디지털처럼 단절되어 있는 까닭은 노동의 분업화와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기 때문이다. 교과 과정을 과목별로 분화해 서로 연계시키지 않고 마치 공장 생산라인에 놓인 제품을 취급하듯이 학생들에게 단계별로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제도이다.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교는 결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우리 어른들이 이루고 있는 직업 형태를 살펴보자. 모두들 전문가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 교육은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통합된 학문이 아니라 그 어느 학문과도 연계되지 않은 대수학을 가르친다. 기하학을 가르치되 거기서 끝이다. 과학을 가르치되 거기서 끝이다. 역사를 가르치되 거기서 끝이다. 결코 통달하지 못할 두 가지 언어(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음울하기 짝이 없는 문학을 가르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로 대표되는 문학 과목을 들여다보면 문헌에 대한 단편적 지식, 이야기 구성과 인물에 대한 짤막한 분석을 암기 위주로 공부할 뿐이다. 이러한 교과목들이 생기 넘치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과목이란 비유컨대, 신이 세상을 창조할 생각으로 품고 끄적거린 개요에 불과할 뿐 하나의 구조물로 어떻게 연결할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의 정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 기관(학교, 정부, 기업)에서 분업과 분과를 채택해 경계가 엄격해졌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초전문화 문화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누구나 당연시하는 규범으로 정착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소개할 때도 "시를 사랑했던 의사이자 운동선수였으며 여섯 자매의 어머니로 전기 기사이자 연주가"라고 소개하기보다는 한 마디로 "전기 기사"라고 소개하는 쪽을 편하게 여긴다.
나 역시 예전부터 가졌던 궁금증이 있었다. 나는 왜 수학을 배워야 하며, 물리학은 어디에 써먹는 거지?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이상한 기괴한 그림을 미분해야 하는지 말이다. 나는 그냥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주입당했을 뿐이다. 즐겁지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내 의지였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곤란하다. 그냥 취업이 잘 될 거라고 하니까, 유망하다고 하니까, 운이 좋게도 점수도 맞네? 그러니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개발자로 전직하기 위한 계단에 서 있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겠다. 나는 개발하는 일이 즐거운가?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너무 지레짐작으로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한 번 몇 개월 일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개발자가 더 싫어졌다. 주말에도 공부를 해야 하니 말이다. 나는 주말을 기다리는 노예의 삶을 살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심리적으로 혹은 재정적으로 별로 만족하지 않아도 하나의 직업을 마지못해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일반화해서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전문가를 목표로 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처한 환경의 노예가 되는 것 같다.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어디에!!?) 마음에 들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 시대의 불행한 현실 중 하나다. 나는 불행했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먹고살려면 타고나든가 아니면 노력을 해서 전문가스러운 배역을 하나 따내라고 하는데 어떡하지? 요즘 먹고살기 위해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고 있지만 개발자로서 내 이력서는 솔직히 내가 봐도 매력이 없다. 회사는 이력서를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핵심 기술이나 분야에 가장 근접한 요소를 지원자가 보유하고 있는지 학위나 자격증 혹은 업무 경험을 통해 확인한다. 다른 회사를 찾아간다고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 취업 성공률을 높이려면 우리는 꾸준히 한 분야에서 노력해 왔다는 걸 회사에 입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박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전문화는 매우 효율적이다. 효율적으로 이 세계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다. 전문화가 없었다면 지금 세계의 형태는 가능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 주장에 대한 마땅한 반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전문화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는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 그게 맞다고 하자. 하지만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그럴까? 급격하게 바뀌는 노동환경에서 이 전략은 가능한지 생각해보자.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 AI)가 발발하면 감염 가능성이 있는 닭은 실제로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전부 살처분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인류가 오랫동안 알을 잘 낳는 닭을 인위적으로 선택해 온 탓에 우리가 기르는 닭들은 거의 복제 닭 수준으로 유전자 다양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그 쓸모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인류 최초의 쓸모없는(useless) 계층이 되는 건 아닐까?
사실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평생 한 가지 일만 사는 게 싫은데 어떡하리? 내 본능을 억압해 가면서 전문가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못할 거 같다. 나는 농사도 지어보고 싶고, 인체의 신비도 알고 싶고, 유전자가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결정하는지도 알고 싶고 우주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그러니 나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원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우리의 본성을 억압해 가면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게 좋은 삶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이른바 전문가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실상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큰 폴리매스들이라는 것을. 예시는 차고 넘친다. 이 책은 예시의 반복이니까. (한 번 읽어보시라! 하지만 예시 반복이 많아 지루할 수 있음)
나는 폴리매스가 되고 싶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 하지만 그려려고 하니 당장의 먹고사니즘에 가로막힌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은 전문가를 목표로 직업을 가지되 그 속에서 시간을 쪼개서 폴리매스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또 한 명의 사기꾼의 아주 정교하고 간악한 혀놀림에 또 속고 있는 것일까? 고민이다. 고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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