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유전공학 발전의 주된 장애는 윤리적, 정치적 반대이다. 인간에 대한 연구 속도가 느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적 주장이 아무리 그럴싸하다 해도 그것으로 다음 단계의 발전을 오랫동안 지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발전에 인간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하고, 불치병을 정복하며, 우리의 인지적 정서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특히 그렇다.
우리가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그 약이 건강한 사람의 기억력을 극적으로 증진시키는 부수효과가 있다면 어떨까? 누가 그와 관련된 연구를 중단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치료제가 개발되었을 때 그 약을 알츠하이머 환자에게만 사용하도록 하고 건강한 사람은 이를 복용해 천재적 기억력을 얻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어떠 법 집행기관이 그럴 수 있을까?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상류계급은 자신들이 하루계급보다 똑똑하고 우월하며, 전반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속였다. 사실 가난한 농부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지능은 상류계급 아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유전공학 및 의학의 도움을 받는다면 상류계층의 허세가 머지않아 객관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과학소설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종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프랑켄슈타인 신화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기술이 발달할 경우,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 존재는 체격뿐 아니라 인지나 감정 면에서 우리와 매우 다를 것이다. 모종의 핵 재앙이나 생태적 재앙이 개입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거란 이야기다.
우리가 과학자들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보다 진실로 우월한 존재를,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을 바라보듯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바라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을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사람 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다소 사소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학자들에게 왜 유전체를 연구하는지, 왜 뇌를 컴퓨터에 연결하려고 시도하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듣게 될 표준적인 답변은 십중팔구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병을 고치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것이 표준적인 정당화다. 아무도 여기에 토를 달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보다 컴퓨터 속에 마음을 창조하는 것이 훨씬 더 극적인 함의를 가지지만 말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이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 안의 욕구를 조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싹틔웠던 시점이. 인간의 유전자 군의 다양성은 그 폭이 매우 넓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퇴근 후 쉼의 일환으로 TV나 유튜브 시청이 아닌 책을 읽는 사람들', '도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
왜 나는 이런 성향 혹은 성격을 욕망해 왔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이런 성향을 가진 이들이 이 세계에서 더 많은 자원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기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자원과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고 싶은 나의 욕구의 본질은 생존과 번식을 위함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욕망한다고 어디 다 되던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밤늦게 들어와서 책을 읽는 행위를 나의 뇌에게 쉼의 일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인지는 하고 있으나 막상 실전 상황에 닥치면 머리 쓰는 게 싫고 그냥 쾌락에 내 몸을 던지고 싶다. 그리고 잠이 드는 게 나의 루틴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들과 나의 행위를 결정짓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내린 결론은 유전자다. 물론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확률적으로 유전자가 한 사람의 성향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나의 고민은 내 성향의 원인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기 위함이다. 알면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얘기가 잠시 샜는데, 여하튼 나는 제법 평범한 사람이기에 나와 같은 욕망을 갖고 있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미래도 바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라리가 말한 바와 같이 유전공학의 출발점은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아주 좋은 명분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강화라는 목표 또한 함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다. 질병 없이 말이다.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특히 부자들을 더더욱 그럴 것이리라 생각한다.
만약, 인류가 우리의 신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종국에는 지적 설계가 가능한 시점까지 온다면 과연 생물학적 불평등이 올까? 그리고 나는 그때가 되면 나의 신체를 개조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이게 내 최대의 관심사다. 모두가 생물학적 개조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식민지화한 행성이 지구밖에 없는 시점에서는 누군가는 사망해야 지속 가능한 행성이 될 테니 말이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불안하다. 하지만 하라리가 제시한 미래상은 참으로 흥미롭고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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