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는 공인중개사로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한 10년 전,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다. 중개서비스를 받아본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마 공인중개사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하는 일도 그리 많지 않으면서 비싼 수수료를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다. 또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유리에 붙어있는 '중개사고 시 최대 1억 보장'이라는 문구 역시 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부분이리라. 이놈의 보장액은 십 년이 지나도 변동이 없다. 그동안 오른 집값이 얼마인데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분노도 이해된다. 내 부모이고, 교육비며 주거비며 나를 키우는 데 사용된 대부분의 부대비용이 중개 수수료에서 나온 걸 감안하면 나 역시 간접적인 이해당사자에 해당한다. 여기서 고민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 내가 간접적인 이해당사자임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하냐는 것이다. 법률이 정한 범위 내에서 수취한 수수료를 가지고 교육비, 주거비 등 내게 투입된 각종 비용이 쓰였다고 한들, 나는 그 돈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 부당한 돈은 아니나, 사람들이 인정하는 돈도 아닐 터. 나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있어야 하는 걸까? 사실 이렇게 의문문으로 내 생각의 현 상태를 표현한 것 역시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게 자연스러움에도 그러기 싫어서 알쏭달쏭한 감정 상태인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봐라. 지금도 '모른다'로 문장을 끝내고 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은 쓰는 건 아니다. 바로 생태계 파괴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이다. 위에 말했다시피, 나의 엄마는 약 10년 전에 중산층보다 조금 더 소득 수준이 높은 아파트 단지에서 중개 사무소를 운영했다. 아파트 매매가가 기타 다른 지역보다 더 높았기에 전세나 매매 건당 수수료가 높았다. 일반적으로 중개사무소는 그 경쟁률이 꽤나 치열하다. 그래서 한 중개 사무소가 그 일대를 독점하는 경우는 잘 없고 대부분 수요가 있는 지역에 여러 개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모여 있어, 그들끼리 경쟁하는 구조다. 내가 본 바로는 가격으로 경쟁하는 경우는 많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공인중개사 역시 영업을 잘해야 한다. 일단 손님들이 와야 중개고 뭐고 될 테니 말이다. 영업이라고 하면,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준다거나, 매물이 생겼을 때 계약할 거 같은 이들에게 전화를 바로바로 넣는다거나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네이버 광고도 반드시 해야 했던 것 같다.
자, 나의 엄마 역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엄마의 옆. 옆. 옆 사무실에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들어왔다. 해당 중개사의 사장은 70대 노인으로 은행원으로서 은퇴한 후, 자신의 부인과 같이 사무실을 운영했다. 꽤나 나이대가 있어 보이지만 이들은 생태계 파괴자들이었다. 영업력으로 공인중개사가 특별한 경쟁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압도적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역시 가격 경쟁력. 즉, 수수료를 할인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엄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인중개사는 수수료 할인이라는 마케팅을 펼치지 않았다. 아마 짐작해 보건대, 중개수수료는 경기도에서 정한 중개 수수료율에 의거하나,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 가격을 제대로 내지 않으려는 유인이 있다. 대부분 그 수수료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손님들은 현장에서 몇 프로라도 깎으려고 하며, 심하면 절반의 할인까지도 요구한다. 계약 당사자가 수수료 할인을 요구하면 중개사들 입장에서는 안 해주기도 참 그렇다. 변호사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받는 의뢰인들 역시 판결 전과 후의 태도가 달라지는 고객이 왕왕 있다. 물론 그들은 수임 계약서가 있으니 법대로 하면 모든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명분이 있으나 업계 평판이라는 것도 무시 못하리라. 또한, 실랑이하는 내 감정 비용도 고려 안 할 수 없다. 중개 수수료는 이런 상황이 비교적 비일비재하다. 앞서 말했듯 소비자가 느끼는 수수료의 체감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중개사들은 어차피 100% 수수료를 받지 못할 걸 알기에 쉽사리 수수료 대폭 할인이라는 마케팅을 하지 못한다. 박리다매로 하기에는 주변의 경쟁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자발적 수수료 할인이 치킨게임이라는 것을. 차라리 경쟁은 하되, 앞장서서 수수료 할인을 하지는 않기로 그들끼리 암묵적 합의를 마쳐 놓은 상태인 듯하다.
그런데 이 노부부가 운영하는 사무소는 수수로 절반의 할인을 적극적으로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이 그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나 같아도 거기로 갈 거 같다) 수수료를 깎아준다는데 안 갈 손님이 어디 있으랴? 그들은 박리다매의 길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노부부가 운영하는 가게 한 곳만 살아남고 그 일대의 공인중개사는 가격 면에서 경쟁이 안 되기 때문에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가게를 정리하거나, 아니면 그 노부부가 제시하는 가격만큼 자신들의 중개 보수를 낮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 수준으로 수수료를 낮추면 사무실 운영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태계 파괴자가 한 명일 때는 모든 자원(손님)이 거기로 몰리니 해당 가게는 수익 창출이 가능하겠으나, 그 일대의 모든 공인중개사가 똑같은 가격 정책을 취하면 손님들(자원)은 분산되므로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찾는 지점까지 사무실 운영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공인중개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나의 엄마를 포함해 대부분의 공인중개사들은 수수료를 인하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 노부부들은 자신들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교란종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노부부를 매우 적대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뺏어가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 아들이라는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경쟁 아닌었던가? 즉, 가격을 인하함으로써 그 노부부는 가격 경쟁력면에서 우위를 점했고 중개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들 역시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받으면 좋은 일 아닌가? 단지 여기서 잠재적인 피해자는 나의 엄마를 비롯한 그 일대 공인중개사 사무소일 것이다. (그들을 피해자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치 않다. 굳이 분류하자면 도태자(?) 정도?) 그들의 소득이 줄어드니 말이다. 하지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도태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암묵적인 담합은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저해하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양질의 서비스를 받게 하지 못하니 말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뒷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위 내용은 그저 어린 고등학생 눈에 비친 현상을 토대로 저술했을 뿐이다. 우리의 기억은 완전치 못하다. 그리고 기억은 끄집어낼수록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저술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했을 수 있음을 알아달라.
자, 결론이다. 내부자의 입장(사실 엄밀히 말하면 내부자는 아니다)에서 그리고 나의 엄마와 이해를 같이 하는 아들이 입장에서 볼 때 그 노부부는 참 미웠다. 나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다니, 어쩔 때는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 시점에서 그들의 행동이 그렇게 비난받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글쎄다. 그들의 자본주의의 원리를 어떻게 보면 나의 엄마나 그 일대 공인중개사 사장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쟁은 서비스의 질과 효율성을 향상하고 최종적으로 그 혜택은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바가지로 샀다고 하면 분노한다. 그리고 공인중개사 사장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왜 그랬던 걸까? 아마, 이 같은 일은 지금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비단, 공인중개사 집단뿐 아니라, 의사, 간호사 기타 이해관계자들이 많이 모인 집단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담합도 하고 기타 외부에서 보면 거시기한 일도 많이 할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내게 바가지를 씌우면 매우 분노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 집단에 들어가면 그 집단의 지배논리를 거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 뭐 그런 거 아니겠어?"라며 세상의 잔혹함에 찌든 사람처럼 말이다. 쉽지 않다.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나 청렴하고 세상의 정의를 등에 지고 있는 사람들이 왜 자신 일만 되면 180도 달라지는지.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서 그런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라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나 포함) 선택적으로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추악한 면은 쏙 감추고 불합리한 부분에서 정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지점에서는 그들은 굉장히 온순한 양이 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추잡한 인간이다. 인간이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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