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Log/2023

안과에서의 오전 그리고 멋진 어른이 된다는 것

깡칡힌 2023. 5. 9. 23:41

얼마 전에 누나와 같이 안과 검진을 하러 갔다. 난 수술한 지 5년이 지나 딱히 검진을 할 필요를 못 느꼈으나 누나가 가는 김에 같이 따라갔다. 수술 후 나의 눈 상태를 점검해봐야 하기에,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안압 검사, 시력 검사 등을 포함해 5~6가지 정도 검사를 했다. 검사를 하는 내내 병원 사람들은 꽤 차가워보였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기계와 다름없었고 공장에서 찍어낸 노동자 같았다. 그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느낌은 그러했다. 그들은 마치 이틀의 주말을 향해서 현재를 견디는 사람들 같았다. '일을 하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다소 섬뜩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 내 자아가 말살될 거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실 그들은 편하게 직장 생활하고 있는데, 나 혼자 괜스레 오버해서 시적으로 그들의 삶을 일반화한 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특별하게 포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동일한 시간, 동일한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나는 검사를 받는 내내, 검사 장비에 주목했다. '이 장비는 어떤 회사에서 만든 걸까? 이 장비를 납품하는 회사 매출이나 순이익은 얼마일까? 회사의 주가는 얼마지?' 나는 생활 속의 투자 기회를 발견하는 깨어있는 투자자인 척을 했다. 왜, 주식 고수들 보면 생활 속의 기업을 찾아서 투자해서 부자가 됐다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지 않나. 나 역시 그들의 모습을 한 번 모방해봤다. 꽤 있어보이지 않는가. 사실 검사 장비에 프린팅 돼 있는 회사 이름을 구글링 한 거 빼고는 딱히 한 게 없지만 말이다.

 

검사를 완료한 후, 5년 전 나의 눈을 수술해주신 원장님과 대면했다.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참 인자하고 여유가 있어보였다. 우리나라 의료는 박리다매적 성격이 강해서 의사 한 명이 환자 한 명을 대면하는 시간은 3분 남짓이다. 빨리 다음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안과는 과 특성상 다를지도 모르겠으나, 나와 나의 엄마 딸을 수술해주신 원장님은 참으로 인자했다. 차분하고 인자한 말투, 그리고 환자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게 내 눈에 보였다. 물론 환자 한 명당 단가가 비싸서 충분히 자신의 시간을 투입해도 괜찮을 수도 있지만 동일 환경에서 안 그런 의사도 분명 있을 터이니, 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환자로서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환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마음에 좋았지만 그가 누나에게 보인 한 행동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누나가 그에게 물었다. "눈 보호를 위해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착용하는 걸 권장하시나요?" 사실 블루라이트가 눈에 안 좋지 않다는 주장은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한다. 나 역시 눈 보호에 관심이 많아 전에 구글링도 해보고 유튜브에서 영상도 본 기억이 있어 위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누나는 해당 사실을 몰랐던 듯하다.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확인 차 물어봤거나. 누나의 질문에  그 원장님은 갑자기 ChatGPT에게 누나가 했던 질문 그대로 타이핑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이핑이 아니라, 히스토리에서 해당 질문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 말인즉슨, 이전에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블루라이트가 눈에 안 좋다는 사람은 전부다 안경 팔아먹으려는 사람들이에요. (화면을 보여주며) 얘도 그렇게 말하죠?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ChatGPT한테 물어보세요. 얘가 저보다 똑똑해요. 앞으로 사기꾼은 전부 없어질 거예요." 내게는 꽤 인상적인 답변이었다. 나의 아빠와 비슷한 또래의 어른이 이렇게 멋진 사고방식을 가졌다니.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어른이 없는 걸까? 내가 가난해서일까? 부자가 되면 우리 아빠 또래임에도 이렇게 깨어있는 어른을 볼 수 있는 걸까? 내가 그 한순간만 보고 이 원장님을 매우 진보적인 어른이라고 평가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눈에 그는 호기심 많고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는 어른인 것 같았다. ChatGPT에게 물어본 그의 히스토리 스크롤은 꽤 길었으니 말이다.

 

안과 원장님과 면담이 내게는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면 그처럼 되고 싶었다. 세상에 대해 계속 호기심을 갖고 계속 질문하는 그런 어른 말이다. 그리고 나보다 젊은 이들에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그런 어른 말이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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