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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지구는 없다 (Tyler Josef Rasch)

깡칡힌 2022. 11. 18. 14:25

두-번째-지구는-없다

 

예전부터 '한 번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미루어 두었던 책인데 마침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어서 보게 되었다. 타일러 씨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방송인(?)이다.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뛰어난 한국어 문장 구사력과 그 문장 속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지식 수준에 항상 감탄했다. 그는 내 눈에 소위 천재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기후 위기를 주제로 책을 냈을 때 그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타일러 씨의 꿈은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 사람에게 간간히 "꿈이 뭐에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꿈은 대부분 명사형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어른 들로부터 "뭐가 되고 싶니?" "꿈이 뭐니?" 라고 질문을 받으면 100에 99는 명사형 답으로 끝난다. 여기서 명사형은 대부분은 직업을 의미하는데, 이를 테면, 대통령, 소방관, 연예인 같은 식이다. 이 사회는 꿈의 자리를 진로에 빼았겼다. 어린 아이가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하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거구나."라며 아이의 순수한 꿈을 진로라는 틀 안에 가둬버린다. 꿈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로 끝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타일러 씨의 동사형 꿈은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타일러 씨가 생각하는 기후 위기에 대한 그의 견해와 우리가 기후 위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문제를 조금 더 구체화 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나도 평소에 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관심 가지는 환경은 기후 위기의 범주에 속하기보다는 쓰레기에 대한 게 컸다. 배달 음식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매주 목요일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한 트럭 싸이는 재활용 쓰레기들을 보면서 항상 드는 생각이 있었다. '플라스틱 용기가 음식물 때문에 저렇게 오염됐는데 어떻게 재활용을 한다는 거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즈음에 미디어에서 환경 오염 또는 기후 변화(엄밀히 말하면 기후 변화라는 이름보다는 기후 위기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게 더 옳다. 기후 위기라는 용어가 더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가 심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심 '기후 위기가 심해지니 나라도 재활용 조금 더 신경 써서 하면 미래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라고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재활용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문제의 핀트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내가 하는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내가 하는 행동이 현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문제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이를 테면, 내가 아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환경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생산된 커피콩이 탄소를 얼마나 발생시켰는지를 이제는 알아야 한다(어쩔 수 없다. 이런 노력을 기울리지 않으면 이제는 멸종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오고 있다).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면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건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화시켜야 한다. 한 개인이 이런 작업을 하는 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업이나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냥 제 3자에게 맞겨놓고 지침을 내려달라는 건 이제는 또 하나의 책임 회피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알기 위한 지식을 갖기 위해 내 시간을 투자해서 옳은 정보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 책 또한 그런 노력의 일부이다.

 

알고 있다는 것.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정보를 얻고 그것이 내 지식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묘한 쾌감과 함께 어쩔 때는 오만한 우월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걸 안다는 건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후 위기에 관련된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죄책감과 동시에 내 행동에 알게 모르게 제약이 따른다. 예전에는 소고기를 먹을 때 맛있게 먹자라는 생각밖에 안 했다면, 요즘에는 이 소고기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만큼의 탄소가 생산됐을까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물론 나는 매우 위선적인 사람이기에 이런 생각 때문에 소고기를 안 먹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은 내 행복감을 저하시킨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으면 지금의 생활 방식을 누릴 수 없다고 여러 매체에서 너무나도 큰 겁을 주니, 앞으로는 이런 감정과 평생 함께가야 할 듯 싶다.